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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일보 7/7일 자, <여운형 관련>부분, 음해 보도에 대해서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3-07-10



[단독] 文때 보훈처 “윗집 오더다”… 호국영웅을 반민족 친일파로 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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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chosun.com/politics/politics_general/2023/07/07/VHJXCSRT3JH7JFLI5UO5ZKZI5Q/


* 조선일보 7월 7일자 석조 기자의 위 기사 중 <여운형>에 관한 부분을 주목합니다.





<반면 일제에 충성을 다짐하는 전향서를 쓰고,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을 받은 행적이 당시 신문과 문서에 기록된 여운형 같은 좌파 인사는 빠졌다.> 부분입니다,.
위의 7월 7일 자, 조선일보 기사는 아래 조선일보의 2009년 12월 19일 이한수 기자가 쓴 사건의? 재판입니다.






2009년 12월 19일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의 글입니다.

그 당시, 이 글에 대해 기념사업회에서
<조선일보>에 대반 반박문 <이제 그만 몽양의 품으로 들어오시라>를 썼습니다.

그리고 2010년, 친일 등을 주장했던 조선일보 기사를 반박한

제대로 정리해 준 "오마이 뉴스"의 관련기사입니다.


"보수진영의 '여운형 친일파' 주장은 허구"







이 후,
이한수 기자의 이 글이 언제 없어졌는 지는 모르지만
기사찾기를 해 보니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나옵니다.




2009년 < "몽양여운형선생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당시 사업회의 신동진 사무처장, '몽양살림이'님의 글입니다.>


<조선일보>에 대반 반박문 <이제 그만 몽양의 품으로 들어오시라>


앞서 우리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1813친일진상규명위에서 몽양 선생 친일행위를 조사했는데... ’에서 필자는 이제 몽양 여운형 선생을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것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은 할 수 없는 말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제 정신 갖고는 보도될 수 없는 기사가 <조선일보>에 나왔다. <조선일보> 12.15일자 A6면에 이한수 기자가 쓴'親日명단'서 빠진 여운형, 친일행적 또 나와제하의 기사에서, <대동신문(大東新聞) 1946 2 10·17·18일자, 여운형을 '친일파'로 분류한 광복 후 미군사령부 정보보고서와 조선공산당 문서 등의 자료를 근거로 다시 한 번 몽양 선생을 친일파로 매도했다. 그리고 그런 몽양 선생을 친일인사로 규정하지 않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진상규명위>의 조사결과를 조사부실편향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런 <조선일보>의 보도가 사주(社主)의 조부가 친일파인사로 규정된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자 하는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조선일보>의 행태는 자신을 점점 더 파멸의 길로 빠져들게 하고 있으니, 이제는 한심함을 넘어 측은함마저 느끼게 한다.

 

<대동신문> 인용한 <조선일보> 기사는 다음과 같다.

 

「〈대동신문의 여운형 진술서는 1943 2 6일 일본인 검사 스기모토(杉本寬一)에게 제출된 것으로 "나는 조선민족의 관념을 완전히 청산하고 적신(赤身)으로 되여서 총독의 명령에 복종하야 당국에 협력하야서 국가를 위하야 활동하랴고 생각함으로서 좌()에 맹세합니다"라고 썼다.

 

<조선일보>   근거로 들이댄 <대동신문> 1945 11 창간되어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몰아 붙였으며, 여운형 암살음모를 찬양할 정도로 반인권적인 보도를 하다가 미군정에 의해 정간 처분을 받았던 신문이다. 인권보호가 신문의 중요한 사명임을 고려할 , <대동신문> 사회의 공기(公器) 아니라 흉기(凶器)였다.

 

평소 <조선일보>가 극진한 친미(親美)노선을 견지했던 점을 고려할 때, 미군정마저 쓰레기 취급한 <대동신문>으로 자신들의 논지를 세우려는 모습이 참 가련치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대동신문>의 발행인은 이종형이었다. ‘이종형이 누구인가. 이에 대해서는 <조선일보>가 이미 평가를 내린바 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DRW00005610326d.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8pixel, 세로 30pixel

 왼쪽 <조선일보> 1949 1 11일자 에는   

 '자숙하라! 친일군상' 이라는 제하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1949 1 8일 해외로 도피하려던

  화신백화점 소유주 박흥식이 백화점 현관에서

  체포됐다. 그를 시작으로 관동군 촉탁 출신

  이종형, 중추원 참의를 지낸 최린, 경찰

  노덕술, 지식인 최남선·이광수 등이 속속

  검거됐다. 그들의 혐의는 '일제하의 친일(親日)

  행위'였다’”

 

<조선일보>는 자신들이 스스로 친일파라고 보도하며, ‘자숙하라! 친일군상이라고 일갈했던 그 이종형의 입을 빌려서라도 자신들을 변호할 수밖에 없는 초라한 신세, 아니 제 정신이 아닌몰골로 퇴락한 것이다.

 

이종형관동군 촉탁으로서 한 일은 밀정 활동이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250)을 밀고, 체포토록 해, 죽음에 이르도록 한 악명 높은 반민족행위자가 바로 이종형이었다. 이런 민족의 살인마가 해방이 된 뒤에는 몽양 선생을 찾아와 함께 일하게 해달라고 구걸을 했다. 웬만한 친일 행위였다면 용서하셨을 몽양 선생이었지만 이 작자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이종형은 몽양 선생께 호된 꾸지람을 받고 쫓겨났고, 그 이후 이종형은 몽양 선생에게 앙심을 품고, 패악질을 일삼았다.

 

똥도 약에 쓴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제 <조선일보>는 자신들이 마치 똥보다도 못한 인간말종처럼 보도했던 작자를 무덤에서 불러내 자신의 얼굴에 화장이랍시고 하고 있다. 그러니 한심하다 못해 인간으로서 측은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조선일보>가 근거로 내민 미군정 보고서. 소위 ‘G2보고서. 이 부분 기사는 이렇다.

 

일제 패망 후 서울에 진주한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1945 9 12일자로 작성한 비밀문서 G-2 Periodic Report에서 여운형은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이며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 (아마 2000만엔)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위 기사를 보면 마치 여운형이 친일파였다는 것을 미군정조차 공식인정했다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으나, 사료라고 하는 것은 전후의 맥락을 고려해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미군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45 9 9일이고, 아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한 것이 912일이다. 진주 후 단 3일 만에 여운형이 친일파였다는 결론을 낼 수 있었겠는가? 우리 기념사업회 측에서도 당시 미군정의 G-2 Periodic Report를 모조리 갖고 있는데, <조선일보>가 보고한 그러니까 위의 보고서는 미군이 오자마자 접한 한국인들이 한 얘기를 기록한 것이다.

 

이 때 G-2가 만나 조선의 정황을 브리핑 받은 한국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 구미유학파들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의 면면은 단 1명의 예외 없이 한민당 지도부이거나 아니면 그와 연계된 사람들이었다. 당시 몽양 선생은 두 번째 테러로 양평에서 요양 중이었다. 친일과 은둔으로 일제강점기를 지냈던 우익세력들이 미군에게 접근해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려 몽양에 대한 거짓 정보를 흘렸던 것이 바로 위 보고서 내용인 것이다. 한민당 계열은 이후로도 계속 몽양의 친일문제를 거론했다. 몽양을 끌고 들어가야만 자기들이 해방 전에 했던 친일행각을 희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1946년 미 국무성이 파견한 하지 사령관의 정치고문 레너드 버치 중위는 여운형이 전쟁기간 중 일본의 고위층과 극비관계를 맺었다는 비난이 한민당 등에서 제기되므로 미군정 외무부 소속의 찰스 오라이오단 소령을 동경에 파견하여 이 문제를 조사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에 하지 사령관도 그럴 듯한 이야기다. 나도 여운형에 대해 무엇(약점)을 잡고 싶다며 오라이오단을 동경으로 파견했다. 그 결과 여운형에 대한 모든 친일 비난은 사실무근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미군정의 1947 3 7일자 기록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여운형의 일본 관련설에 대해 찰스 오라이오단이 일본에서 조사한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오라이오단이 인터뷰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의문이 생겨났느냐면서 놀란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여운형을 조선의 훌륭한 애국자의  사람으로 간주했다. 로빈슨.(The result of the investigation of Lyuh's Japanese connections in Japan by Charles 0'Riordan was negative. Not a scrap of supporting evidence. Most of the people 0'Riordan interviewed seemed amazed that any question had come up. They considered him one of the outstanding Korean patriots. Robinson.)

마지막의 Robinson은 당시 미 제24군단 G-2(정보부) 책임자 존 N. 로빈슨 대령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조선일보>에 실린 ‘G2 보고서의 기사는 역으로 해방 직후 국내의 친일파, 우익세력이 얼마나 파렴치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것이다. 그런 자료를 자신들의 친일행각을 희석시키기 위해 들이미는 <조선일보>의 모습은, 참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하는 작태로서 역시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조선일보>가 마지막으로 근거로 내민 자료가 조선공산당 자료다. 기사는 다음과 같다.

 

1950 11월 유엔군이 노획한 조선공산당 문서도 그를 "변명할 이유가 없는 친일분자"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기사를 써서 마치 공산당도 몽양을 친일분자로 보고 있었음으로 몽양은 틀림없는 친일파였다는 결론을 유도하고 싶었겠지만 너무 천박하다. '노획문서'라 하는 것은 미군이 6.25 때 북진하면서 압수한 문서를 말하는데, 이 문서의 분량은 몇 트럭분도 넘는다. 몇 트럭분이 넘는 방대한 '노획문서' 어디에 그런 기사가 있었는지도 밝히지 않고 마치 조선공산당 문서가 몽양을 친일파라고 보았다는 식으로 호도하는 기사야말로 국립중앙도서관에 무슨 얘기가 있다는 식의 웃기는 기사가 아닌가.  그 많은 문서 가운데 무슨 이야기는 없었겠는가?

 

역사 연구자라면 다 아는 얘기이지만, 1946년 여름부터 좌우합작문제와 3당합당 문제를 둘러싸고 여운형과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사이는 적대관계로 바뀌었다.그러니 박헌영 쪽에서 얼마든지 나쁜 이야기를 했을 수 있다. 하지만 공산당은 최고지도자 이외의 인물은 다 폄하되고 매도된다. 정치적 풍향에 따라 과거의 동지가 적으로 몰려 숙청되기도 한다는 것은 다들 아는 이야기가 아닌가? <조선일보>의 기사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여운형을 친일분자로 몰았다는 조선공산당의 책임자 박헌영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그 또한 일제 협력자요, 미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되지 않았는가? 이런 것이 소위 공산당의 스탈린식 날조라는 것이다.

 

  사료를 보는 눈도 없고, 전후맥락과 사정을 무시한 채 남을 매도하는 방식으로 기사를 쓰는 <조선일보>는 정말 천박하다. 평소 반공노선에 충실한 <조선일보>라면 조선공산당자료까지 가져와서 누구를 분칠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사료를 제공한 당사자는 정진석 외대 교수였다고 기사에 쓰여 있는데, 학자인 정교수가 사료를 그런 식으로 보았을 리도 없고, 사료와 관련한 전후사정을 설명하지 않았을 리도 없다. 만일 정교수가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식으로 거두절미하고 사료를 제공했다면 학자로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독자를 속이려고 미군정 'G-2문서' '노획문서'니 하는 식의 구름 잡는 사료 말고 필자가 위에 제시한 <로빈슨 문서>처럼 제대로 된 믿을 수 있는 사료를 제시하기 바란다.

 

<조선일보>가 몽양을 폄훼하려면 보다 근사한 역사학자, 근사한 사료를 제시하기 바란다.

 

1943년 몽양 선생의 친일글귀 등과 관련해서는 이 자리에서 얘기하기 구차한, 감옥에서 풀려나와 심신이 피폐해진 몽양 선생을 이용해서라도 조선 청년들을 전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일제의 간악한 공작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와중에서 <전향서> <학병권유문>이니 하는 것이 나왔다고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정식 교수의 <몽양 여운형>이란 평전에 그 내막이 자세히 실려 있다. 한마디로 아닌 것이다. 가령 <학병권유문> 같은 것은 <경성일보>의 사회부 차장이었던 일본인 기자가 출옥한 몽양 집까지 따라와서 10분간 인터뷰하고 난 뒤에 작문해서 여운형의 이름으로 <경성일보>에 실은 것으로 그 진상에 대해서는 당시 <경성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조반상씨도 증언한 바가 있다. 무엇보다도 같은 시기에 몽양은 국내 유일의 항일조직인 <건국동맹>을 결성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친일파의 후손들은 계속 자기들 입장을 낫게 하기 위해 계속 여운형을 끌고 들어가려고 한다. 이미 유명을 달리한지 62년이나 된 분을 계속 끄집어내어 친일했다고 우기는 것이다. 그러나 몽양이 친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것을 판단하는 간단한 기준이 있다. 친일을 했다면 무언가 얻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지켜야 할 재산이 있었거나. 몽양은 돈이나 자리나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고, 지켜야 할 재산도 없었다.

 

폄훼자들이 계속 들이미는 설 중의 하나가 몽양이 총독부로부터 2천만엥을 받았다는 것인데, 한민당이 조작해낸 이 설은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다. 폄훼자들은 미군 자료에도 그런 게 있다고 떠들지만 필자도 다 조사해보았다. 그건 미군정이 조사해서 내린 결론이 아니고, 한민당 계열 사람들이 떠든 내용을 미군정이 그냥 참고삼아 적어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방당시 조선의 통화량은 48억엥이었다. 그런데 2천만 엥이라면 오늘날로 치면 4천억 원도 넘는 어마어마한 돈인데, 몽양은 죽을 때까지 가진 재산이라곤 계동의 38평짜리 한옥 한 채밖에 없었다. 돈이 없어 자기 차도 한 대 갖고 있지 못했다. 4천억 원이나 있었다면 위장으로 검소한 척했겠는가? 친일해서 무슨 자리를 얻었나? 동네 면장자리도 얻은 일이 없다. 그런데 무슨 친일을 했다는 것인가?

 

나라 잃은 민족의 지도자로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고통을 인간말종 이종형같은 인간과 그가 운영하던 <대동신문>은 헤아릴 수 없었겠지만, 이제 60여년이 지나 그런 기사를 다시 끄집어내는 <조선일보>의 태도는 도대체 뭔가? 일제강점기 때의 친일이 모자라 지금도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고 싶다는 것인지...

 

몽양 선생은 악질 친일파만을 제외한 모든 민족이 대동단결할 것을 주장하셨던 분이다. <조선일보>는 스스로 악질 친일파가 되고 싶다는 것인가? <조선일보>도 한때는 민족지다운 풍모를 보이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 이젠 그만 정론지로서의 품격을 되찾고 몽양의 품으로 들어오시라.  .




첨부파일
조선일보 반박문.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