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치웅 선생의 몽양 여운형 회고담1) 단파방송 청취와 관련하여1946년 이만규가 몽양의 구술을 받아 집필했던 <여운형 투쟁사>라는 책에 보면, 몽양은 해방직전 단파방송수신기를 제작한 손웅(孫雄)이라는 학생으로부터 포츠담 선언 등 연합군의 정세와 일본의 패전 소식을 접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만규의 책에 등장하는 손웅이란 학생이 바로 오늘 좌담회를 가진 손치웅 선생입니다. 좌담회는 순서가 없는 방담이었지만, 회원들의 가독성을 위하여 일문일답형식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왜 여운형 전기에는 손웅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것입니까?답) 이만규 선생이 내 이름 손치웅 가운데 ‘치’자를 빼고 그렇게 적은 것입니다. 아마도 내 존재를 보호해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몽양 선생은 언제부터 만나시게 되었습니까?답) 내가 경기중학에 다니던 1944년부터였습니다. 몽양 선생의 어린 조카 가운데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여운형 선생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친구 따라 몇 번 그 집에 놀러가곤 하여 안면이 있는 정도였고, 차츰 배화여중에 다니던 몽양 선생의 따님들과도 눈인사를 할 정도의 사이가 되었습니다.--어떤 계기로 단파방송을 청취하게 되었습니까?답) 사실은 영어를 좀 공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과학에 취미가 있던 나는 중학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 발명품을 만들어 당시 일본정부로부터 누차 대상을 받았던 처지라 단파방송 수신기를 만드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이리저리 다이알을 돌리다가 나는 미국에서 한국어로 송파되는 <미국의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당시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시각으로 자정이 되면 어김없이 울려 퍼지던 올드랭 사인곡의 <애국가>를 나는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나는 이 방송을 듣다가 걸리면 큰일이라 생각하여 반침 마루를 뜯고 그 밑으로 마당까지 이어지는 비밀 통로에 들어가 방송을 듣곤 했습니다. 그리고 방송을 듣고 나오면 마루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이부자리를 덮어놓아 아무도 모르게 했습니다.--단파방송의 내용을 어떻게 해서 몽양 선생에게 알리게 되었습니까?답) 1944년 여름방학 때였는데, 하루는 그 집에 놀러간 저에게 몽양 선생이 당신과 함께 시골로 놀러가지 않겠느냐고 하셔서 나는 좋아라고 봉안 이상촌으로 따라갔습니다. 거기서 며칠 몽양 선생과 기거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내가 제작한 단파방송 수신기로 <미국의 소리>를 들었다고 하니, 몽양 선생이 눈빛을 빛내며 좀 자세히 말해보라고 하셔서,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청취한 내용들을 기억나는 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몽양 선생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하시면서 청취한 내용을 정기적으로 알려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일본방송은 맨날 일본이 이기는 것처럼 보도했으나, <미국의 소리>가 전해주는 전황은 일본이 패망직전이었던 것입니다.--그때부터 매일 청취내용을 보고하셨습니까?답) 매일은 아니고, 일주일에 두세 번 보고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중요한 숫자 같은 것은 손바닥에 적었다가 다음날 학교를 파한 뒤 밤중에 몽양댁을 방문하여 보고했습니다만, 때로는 몽양 선생이 우리 집을 몰래 방문하셔서 반침 마루 밑의 지하 동굴에 있는 단파수신기를 직접 들어보기도 하셨습니다. 우리 집을 오실 때는 인력거를 타고 오셨는데, 이는 자신의 행방을 일본경찰 눈에 띄게 하지 않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돌아가실 때는 내가 인력거를 불러 몽양선생을 타시게 했습니다. 몽양 선생은 영어를 잘 하시는 처지라 외국 방송을 직접 듣기도 하셨습니다.--그런 은밀행동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지 않았습니까?답) 웬걸요. 1944년 10월경에 나는 체포되었습니다. 몽양 선생 자택 주변에는 늘 일본 경찰과 헌병의 감시가 있었던 것인데, 나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학생복을 입고 그 집을 드나들 때는 오히려 걸리지 않았는데, 안전을 기한답시고 아버지 옷과 모자를 빌려 입고 밤중에 몽양 선생을 찾아다닌 것이 오히려 저들의 감시망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나는 남영동의 용산헌병대에 끌려가 한 달 이상 구금되었습니다.--어떻게 풀려나셨습니까?답) 당시 경기중학 교장이 일본사람이었는데, 이분은 총독부에서도 말발이 서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분이 나를 꺼내주었습니다. 나는 학생 발명왕으로 일본정부의 대상을 거듭 받았던 처지라 아마도 이런 사실이 헌병대에도 통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포츠담 선언 같은 것도 몽양 선생에게 전해주셨습니까?답) 그렇지요. 나는 1945년 경기중학을 졸업하고 그해 3월에 평양공업전문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입학하고 한 달 뒤쯤 경성에서 몽양이 보낸 사람이 내 하숙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급히 상경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해 5월경 상경을 했더니, 몽양선생은 제게 단파방송을 청취하여 그 내용을 매일 보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정국이 긴박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보고를 하면서도 나는 몽양 선생이 당시 건국을 위한 비밀조직을 펴나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해방후에 보니 몽양 선생은 이미 그 무렵 해방후의 치안대 조직과 식량배급문제 등의 문제에 전념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손선생님이 당시 찍은 좋은 사진이 많더군요.답) 제 부친께서 해방 전에 사진관을 하셨기 때문에 내가 사진을 잘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카메라로 찍은 필름이 훨씬 많았는데, 세월 과 함께 그 십분의 일 정도가 남은 것들입니다.
♤몽양사랑지기 주 :
호주 시드니에 사시는 손치웅 선생님을 몽양 추모사업회 홈페이지인 '몽양사랑'에서 소통하다 알게 되었고 드디어 선생님이 우리나라에 오셔서 단독으로 뵙게 된 첫 날. 2003년 봄날, 이때 80세 쯤?이신데 청년의 기상을 가지심.^^"

손치웅 선생님과 몽양사랑지기

왼쪽부터) 손치웅 선생님. 몽양사랑지기,(몽양의 평생동지셨던 유정 조동호 선생님의 아드님이신)조윤구 선생님. 이기형 시인님.

몽양 선생님의 6촌 동생이신 여운혁 선생님 이기형 선생님 손치웅 선생님.
저는 귀여움을 받으며 모시고 다님? 따라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