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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여운형의 생애사와 주요쟁점들- 여현덕
작성자 몽양사랑지기
작성일자 2023-08-07


여운형의 생애사와 주요쟁점들
                                                                         

                                                                                                                     

여현덕 
(여의도 연구소 연구위원)


"조선민족에게도 인격이 인정되어야 한다.....나는 시종일관 민족해방에 정진할 것이다. 저 길가에 피로곤비한 민중을 보라. 빈부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가 절박한...아 감개무량하다." (여운형의 옥중진술)

                                       

 

  1. 민족이익을 최우선시한 지도자

역사가 시대마다 다르게 쓰여지고 진실이 재조명되듯이, 세월이 흐를수록 평가가 높아지는 인물이 있다. 과거 냉전시기에는 동서 체제간의 무한경쟁으로 인하여 역사인물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세계적 냉전과 남북한의 무한정 체재경쟁이 진행될 때는 민족적 정도를 걸었던 인물에 대한 평가보다는 체제적 기준으로 평가받기가 일쑤 였기 때문이다. 체재경쟁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된다고 인식했을 때는 평가절하되어 오랫동안 명예를 되찾지 못한 사례가 왕왕 있어 왔다. 이제 체제경쟁이 완화된 탈냉전기를 맞아 새롭게 빛을 보아야 할 인물들이 제법 있다.
그 중에서도 몽양 여운형은 재평가되어 영광을 되찾고 빛을 보아야 할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요 민주주의를 체득하고 실천한 독립운동가이다.
여운형의 삶은 겸허와 포용의 자세로 민족이익을 최우선시하는 민족주의자로 일관한 것이었다. 그는 일제하 시종 '조선민족의 독립'을 최우선에 두고 정파의 이익을 초월하여 전민족의 단합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해방 후에는 독립운동의 노선 차이가 엄연한 현실로 나타난 좌우파를 연합시켜서 신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는 냉전분위기가 고조되고 좌우를 원심으로 갈라놓는 요소들이 격화되어 가도 있었기에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그를 둘러싸고 당시의 좌익, 우익 등 양측에서 협공을 하였기에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끝내는 괴한의 흉탄에 쓰러졌다. 하지만 그가 사심없이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것은 너무나 커다란 족적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사심이 없었기에 그는 권력 투쟁이 전개되는 격동속에서 자기 몫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오직 민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였던 것이다.
그런 몽양에 대한 평가는 학계와 시민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합의가 도출되고 있지만 정치권이나 정부 차원에서는 아직 평가할 환경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글은 몽양 여운형 선생을 둘러싼 오해나 쟁점을 정리하여 사실의 왜곡을 조금이나마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자 한다.
           
  
                            

2. 기개와 웅지 품은 몽양의 젊은 시절

 

몽양은 1886년 5월 25일 (음력 4월 22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여정현으로 임진왜란 직후 최초로 수호사로 일본에 갔던 여우길(여우길)의 10대손이며, 모친은 백사 이항복의 11대손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조부 여규신에게 한학을 배웠고 많은 감화를 받았다. 조부 여규신은 구한말 중국이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얕잡아 보는데 분개하여 정부에 중국정벌을 건의하고 결사를 꾸미다가 유배를 갔다올 정도로 기개에 찼었는데 여운형은 조부의 웅지를 늘 높이 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로부터 민족자존과 자주정신을 배웠던 셈이다.
(중략)
조부의 푸른 소나무같은 기개에 감동된 그의 민족자주 정신은 항일 독립운동의 노선에서 잘 드러났다.
몽양은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5세때 서울에 올라와 배재학당 홍화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모진 시련이 다가왔다. 결혼한 지 4년 된 부인이 세상을 뜨고, 같은 해 할아버지가 별세했으며, 을사보호조약으로 나라가 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수학을 단념하고 향리 양평에 내려와 집안의 아픔을 딛고서 국채보상운동 단연동맹(단연동맹)을 조직하였다. 스스로 담배를 끊고 금연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각지로 순회연설을 다니는 등 열혈애국청년으로 변모해갔다. 1907년 기독교에 입문한 그는 개화사상에눈을 떠 광동학교를 설립했다. 동방에 빛이 될 인재를 양성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하고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광동학교 이후 초당의숙에서 교편을 잡았던 24세 시절에 가장 감개가 깃들었다고 회상한다.

 


  3. 반봉건 혁신조치와 애국 독립운동

몽양은 1908년 3년상을 치르고 난 뒤 집안의 신주단지를 깨뜨리고 노비를 해방하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후 서울에서 수학을 마치고 해외활동의 대장정을 떠난다.
중국 금릉대학을 마치고 상해로 
들어간 여운형이 이범석을 중국에 데려가 독립운동가로 키웠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상해 임정 태동기에는 제 9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임정의 산파역을 맡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2.8독립선언과 3.1독립운동에 간여하였다. 또 1월에는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고 국내와 일본 및 간도, 시베리아 방면에도 사람을 잠입시켜 독립운동에 관한 여론을 확산시켰다.
상해 임시정부의 외무차장을 지내고 상해 교민단장으로 활동했고, 교민들의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인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김규식의 비서실장을 지낸 송남헌 씨는 몽양의 활동을 "3.1운동의 상황요인이 아닌 원동력"이라고 증언했으며, 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3.1운동을 기획한 진원지는 상해요, 그 주체는 신한청년당" 라는 내용을 발표하여 3.1운동에 대한 몽양의 활동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한 바 있다.

그는 1919년 11월 적지인 동경 제국호텔에서 일본의 식민정책을 혹독히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동양평화, 세계평화에 위배되는 일제의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여 일본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세계의 여론을 집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서간도 , 중국, 모스크바. 몽골. 필리핀, 일본 등지를 떠돌며 애국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몽양은 1926년까지 임시정부에서 외교위원으로 활동할 때, 나라를 빼앗긴 약소국의 대표로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여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22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던 도중의 기행문을 회상기 형식으로 남기고 있는데, 이런 고난의 장정을 걸으면서도 그는 문학적 순수함과 해외문물관찰 그리고 민족의 장래를 연관시키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시베리아 횡단 북행 열차를 타고 가던 도중 어느 소도시의 음산하고 어두컴컴한 낡은 차칸에서 밤을 새우며 보고 느낀 이야기는 우리에게 조국독립을 향한 험로의 일단을 보게 해준다.
낡고 침침하여 천장에 거미줄까지 보이는 구석 객실에서 의자의 쿠션이 다 떨어져 밑바닥 나무가 보기싫게 드러나 낮리에서 딱딱하고 거무튀튀한 빵을 누르틉틉한 찻물에 적셔 먹은 기억, 대기근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 음울한 북방 겨울의 '바이칼'의 매력적인 기억, 체제에 저항하다 이르쿠츠크 감옥에 갇혀 수년 동안 징역살이 등에 처해진 사람들의 모습 회상, 대기근과 광폭한 살육, 파괴의 회오리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털이 많은 사자처럼 생긴 거인 트로츠키가 포효하는 모습 등 자신의 인상에 새겨진 장면들을 잘 묘사하고 있다.

1929년 중국혁명운동 실패 후 상해 복단대학에 체육담당교수로 취직하여 축구부를 이끌고 필리핀 등지로 원정하면서 영미의 식민지정책을 성토한 일도 있었다.
마닐라에서 인상깊었던 일은, 우연히 밀정소년을 통해 마닐라의 빈한한 한 가정을 방문하여 22-23세의 쾌활하고 아담한 필리핀 처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미국인 은행에 근무하다가 하루는 동생이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한 김에 말없이 집에 온 것이 화근이 되어 면직을 당하고 집에서 놀고 있었다. 그날 몽양은 그녀에게 현 사회제도와 국가형태, 정치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녀는 예수의 말씀을 들은 것 이상이라며 감탄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그 후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일생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겠노라고 손을 들어 맹세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종종 서신을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필리핀을 떠나 상해도 돌아오자마자 약 10일 여일 만에 피검되어 조선으로 호송된 탓에 서신을 받지 못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몽양은 어려운 와중에도 틈틈이 문학적 소양이 담긴 글을 쓰곤 하였다. 200년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한 몽골의 '고비사막 횡단기'는 그러한 단면을 잘 보여주며, 민족혼을 살려내야 한다는 투혼과 의지가 묻어난다.

이 사막을 생활의 무대로 하고 이 밤하늘을 생활의 배경으로 하는 저 유목민들의 정열과 감격이 어떠하였는가를 나는 처음으로 아는 듯 싶었다. 세계를 석권한 저 성길사한의 뒤를 이은 이 민족의 지도자들이 전통과 습관에 저린 정주문명에 대하야 보여준 저 완화할 수 없는 적대감과 가차없는 박해와 파괴의 역사도 이 특수한 자연의 분위기 속에 잠길 때에는 극히 단순한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하루는 조선사람의 무덤을 찾아보았다.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이 조선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여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

몽양의 해외활동은 상해 야구장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면서 막을 내렸다. 그는 큰 일을 하면서도 인간미를 풍부히 지닌 채 작은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9년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그의 중국시절은 그가 독립운동의 거두로 자라나는 성장의 시기이자 국제정세의 흐름과 역학관계를 파악하여 후일 정치인으로서 뛰어난 판단력과 균형감각을 갖추도록 하는 밑거름이 되어준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에 두루 가입하여 중국의 민족혁명과정에서 국공합작과 통일전선의 중요성을 뼛속깊이 체험했다. 감옥에서는 영어(囹圄)의 세월을 복당(福堂)처럼 여기며 오히려 의지의 강화와 인격함양에 정진하였다.
몽양은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국내에서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민족적 정론을 펼쳤다. 언론을 통한 민족운동 시절, 그는 손기정 일장기 말소 보도를 맨 처음 주도적으로 보도하였다. 조선중앙일보는 이 보도를 가장 먼저 주도한 것이 문제가 되어 폐간당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신문이 폐간되고 없어 동아일보가 최초로 보도한 것인 양 알려져 있다.


4. 농촌이상향을 꿈꾸었던 봉안 이상촌

봉안 이상촌은 가나안 농군학교의 설립자이자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로 유명한 김용기 장로가 몽양의 깊은 가르침을 받아 1933년에 설립했던 농장이다. 후일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우게 된 정신적·경험적 힘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던 것이다.
김용기는 광동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몽양의 애국정신에 깊이 감동되어 이후 일평생을 몽양의 추종자가 되었다. 김용기는 몽양 여운형을 통해 항일의식을 배우고, 그 정신에 기초한 항일운동과 농촌개조운동을 벌였다. 몽양이 경기도 양서군 신원리 묘곡에서 태어나고, 김용기는 바로 옆 동네인 능내리 봉안에서 태어났다.

김용기가 몽양을 처음 찾은 것은 1937년 여름이었다. 김장로의 부친은 평소 몽양을 칭송해 마지 않았다. "네가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려거든 여운형 선생을 따라 배워라. 보기 드문 애국자요 독립운동가이시다. 인품 하며 학식이 대단한 분이셔".
청년 김용기는 몽양의 6촌 동생 여운혁과 함께 계동 자택으로 몽양을 찾아갔다.
비가 오던 날 기역자로 된 마루바닥 여기저기에 세숫대야며 놋대야 따위가 놓여져 떨어지는 빗물을 받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김용기는 당대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자 조선 체육회장이 사는 집이라 으리으리할 줄 알았는데 비참하리만큼 가난한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참된 애국자, 진정한 독립투사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몽양은 김용기, 여운혁 같은 애국청년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조국이여 안심하라'는 자막까지 넣어 서로 보관했다고 한다.

당시 몽양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부국강병의 길이며 독립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해 광동학교를 설립했고, 이곳에서 지리, 역사, 산수 등 신학문을 가르쳤는데, 김용기는 이 학교를 다니면서 여운형의 추종자가 된 것이다. 그는 광동학교를 졸업한 후 마적단 두목이 되어 만주벌판을 삼키고 일본을 멸망시키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한인교회 이성락 목사의 진지한 만류로 마음을 고쳐먹고 농사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김용기는 논 열닷 마지기에 밭 2천 8백 평 정도를 부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농사에 뛰어든 지 2년이 되던 해부터 동네에서 농사를 제일 잘 짓는 농사꾼이 되고 두레패의 부령좌(副領座)를 차지하게 된다.
이때부터 김용기는 에덴동산과 같은 이상향, 즉 오곡이 무르익고 과수들의 꽃이 만발하고, 벌과 나비가 춤추고, 집집마다 젖짜는 양이 있고, 교회가 있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형제가 되어 하나님을 믿고, 모두가 근로하고 생산함으로써 넉넉한 생활을 영위하는 농촌마을 건설을 구상한다. 이에 필요한 것은 10가구와 토지 2만 4천여 평, 토지구입비·개간비·건설비 등 5천 원의 돈이었다.
김용기는 이 돈을 벌기 위해 당시 진행중이던 중앙선 철도공사현장에 잡화상과 이발소를 차려 만2년 동안 3천 5백 원을 벌었지만 청계산에 금광이 있단느 사기꾼의 말에 속아 그 돈을 다 날려버렸다. 이후 김용기는 고리대금업자에게 가서 돈 4백 원을 아무 담보 없이 빌린 후 단돈 90원으로 산판을 구입해 온갖 비웃음을 무릅쓰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과수원을 만들 수 있었다. 과수원을 판 돈 1천 2백 원 가운데 빛 4백 원을 갚고 난 후, 김용기는 비로소 봉안 이상촌 건설에 착수할 수 있었다.

김용기는 야산 4천 1백 평을 사 개간에 착수하면서 뜻에 동조하는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나 무한정 받아들일 수는 없어서, 일단 호구수를 10가구로 정하고 각 호당 최저 5천 평의 경작토지를 확보하게 했다. 이때 김용기와 뜻을 같이했던 동지로서 그와 시종일관 이상촌 건설에 매진했던 사람이 바로 여운형의 6촌동생인 여운혁이다. 이들은 미리 정한 기호 배치도에 따라 주택을 건설했고, 외간의 사치를 금지시켰다. 또한 위생과 생활의 편리를 위해 창을 많이 내어 채광과 환기가 잘 되게 하였고, 울타리에는 단장 대신 무궁화 나무를 비롯한 온갖 꽃나무를 심게 했다. 민족혼을 은연중에 일깨우려는 목적이었다. 그 꽃나무 몇 그루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중략)
이처럼 김용기는 몽양의 사상과 투혼에 감동을 받아 수십년간 그를 추종하였는데 김용기는 몽양을 철저한 민족주의자이자 철저한 국수주의자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편 몽양은 목사가 없던 봉안교회에서 설교하던 김용기의 동작 하나하나와 음성의 높낮이까지도 지도해 주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도산 안창호와 더불어 불세출의 웅변가로 이름높던 몽양이었는데 그의 지도은 후일 김용기의 웅변과 화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몽양은 봉안에 내려와서도 청년들과 팔씨름을 하거나 택견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또 경성에 올라갈 일이 있으면 팔당역까지 달리기를 했다고 한다. 김용기의 큰아들 김종일 역시 몽양에게 웅변술을 배웠으며 그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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